티스토리 뷰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중 '똘스또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서.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본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어떨까.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답을 찾지도, 그렇다고 답을 아는 이도 없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그런 상념에 조금은 답을 찾아 줄만한 책이 있다. 이번에 읽게 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유명한 작가인 똘스또이의 작품이다. 그러나 나에겐 처음 만나는 작품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창비에서 나온 창비세계문학 7번째 작품을 도서관에서 빌릴 때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생각을 던져 줄 거라곤 가늠도 못했다. 작가의 이름 정도만 알았지 작가의 위대함의 정도라든지, 업적에 대해서 알 리 없는 내겐, 그저 제목이 주는 무거운 감정만이 책을 마주한 첫인상이었다..

 

  책 구성은 1부터 12까지 번호로 매겨진 열두 개의 작은 이야기와 4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작품 해설, 그리고 작가의 요약된 일대기, 책의 발간사로 구성돼있다.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책이 내게 준 인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책이란 독자와 작가 사이의 긴 편지이고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계문학은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다를 것이란 두려움. 그리고 어려운 인명과 지명들에 대한 막연한 답답함. 그런 귀찮음을 이겨내고 책을 끝까지 읽어가기란,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굳이 가려는 여행자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집어 들고 완독을 한 지금은 어느 세계문학을 가져와도 읽어보고 싶어 질 만큼 뿌듯하다.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구성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첫 작은 이야기인 ’1‘에서 결말이 이미 나있다. 이반 일리치가 죽은 후 그의 장례식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책 속의 다른 작은 이야기들과 비교해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작가는 이 ’1‘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법정에서의 수다로 시작해 일리치의 장례식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는 이 이야기의 서막으로 보기엔 커다란 의아함을 내게 안겨주었다. 더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인 줄 가늠하기엔, 결말이 지어진 첫 장은 의아함을 적잖이 주었다.

  나머지 11개의 작은 이야기들은 일리치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2‘부터 ’4‘까지는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해 비교적 긴 호흡으로 채워져 있다. 바로 일리치의 찬란한 삶과,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 사건까지, 작가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독특하게 생각했던 점은 열두 개의 작은 이야기 중 ’8‘번 이야기였다. ’8‘번 이야기는 다른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이미 중반부를 넘어선 부분이라 빨라진 독서 흐름을 깨지 않으려면 분량이 크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작가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이 부분을 소설의 앞부분만큼이나 자리를 내어주며 일리치의 투병에 대해 묘사해 두었다. 완독을 하고 나서야 이렇게 분량이 많았음을 깨달을 정도로 읽을 때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크게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앞부분과 나머지 남은 부분의 다리 역할을 하며 소설 전체의 구성에서 전개와 위기를 절묘히 섞어놓은 느낌을 주었다. 여태 읽어온 소설들에서는 받지 못한 독특한 기분이었다. 싫지가 않았다.

 

  그렇게 책은 이반 일리치가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며 마무리된다.가족들의 행동부터, 일리치의 섬세한 감정까지, 작가는 친절히, 때로는 친절하지 않게 묘사해준다. 놀라운 점은 일리치가 죽기 한 시간 전까지 일리치의 감정과 주변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얼마 뒤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작가는 보란 듯이 시간을 정해두고 주인공의 임종의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그 죽음의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하고 만다. 죽음의 덧없음, 삶의 가치 없음, 죽음의 가치, 삶의 덧있음.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네 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종종 상상해보지만 막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당장은 고민하고 싶지 않은 것 말이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로 죽을지 모른다. 그걸 알고 살아간다면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 삶을 살아가겠는가.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감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스스로를 중독시켰다. 가족마저 자신에게 힘들게 하는 존재라 여기며 완벽한 스스로의 죽음마저 통제하려 애썼다. 결국 그도 신이 아니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힘껏 저항하다 끝내 생을 마감했고, 이 소설은 인간인 우리 모두에게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삶에 대해서도. 작가는 비록 100년도 더 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가 남긴 이 책은 그의 죽음도, 일리치의 죽음도, 카이사르의 죽음도, 어쩌면 우리 각자의 내면의 죽음과 살아감에게까지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